출생 1947년 02월 11일 / 대한민국
데뷰 (Debut) 1966년 (천리길)
종교 천주교
취미 그림
특기 그림
학력
-부산 초량초등학교
-부산 대동중학교
-서울 서라벌예술고등학교
가족 부인, 슬하 1남 1녀
프로필
- 최초 취입곡 : "약속했던 길" (확인된 자료 기준)
- 가수로서의 실질적인 데뷔곡 : "천리길"
- 출세작 : "사랑은 눈물의 씨앗"
- 대표곡 : "물레방아 도는데"
- 별명:트로트의 황제
- 취입곡:사랑은 눈물의 씨앗, 물레방아 도는데,울긴 왜 울어 고향역, 영영, 갈무리, 잡초, 무시로, 잡초, 건배
- 추구하는 노래:다시 태어나도 트로트
- 운영하는 사업:음반 프로덕션 '아라기획'(일본과 한국 소재), 무역회사(화와이 소재)를 운영中
- 매력 포인트:짙은 눈썹, 살며시 깨무는 앞니, 호소력 짙은 가창력
- 존경하는 인물 : 막사이사이
- 존경하는 선배가수 : 남인수
- 좌우명 : "최선을 다한다"
- 특이사항
히트곡 수에 있어서도 세계 최다임이 공인
앨범발표 수 : 약 200장 이상.
취입곡수 : 2600여곡 이상 (이중 800여곡이 자작곡)
나훈아는 소위 '트로트의 황제'라고 불리며 70, 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한국의 대표적 트로트 가수이다. 그를 단 몇 줄로 요약하여 설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의 히트곡만 해도 수십곡에 이를 정도이다. 또한 정규작을 제외하고 발표한 비정규 앨범이나 비공식 앨범을 모두 합치면 적어도 200장에 이르며, 취입곡의 수가 2600곡이 넘어선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매년 의욕적인 라이브 무대를 펼치고 있는 그는 가히 장르를 넘어서 한국의 대표적인 남자 가수 중 한 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비음이 섞인 가는 톤과 허스키함을 두루 갖추었고 노래를 부르는 기교와 무대를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많지 않은 가수인데 특히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트로트의 붐을 일으킬 즈음 '트로트의 황제'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나훈아는 비공식적으로 1962년에 데뷔곡을 취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1969년 작품인 을 통해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이 곡을 그의 데뷔곡으로 알고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그의 트로트는 민요풍의 구성지고 서민적인 느낌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레코딩한 곡 중에 상당수는 우리의 전래 민요나 전통 가요였다. 1969년 이후 70년대까지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레코딩으로 불릴 만한 곡을 상당수 녹음했는데, , , 등 여러 곡이 있다. 그는 노래 실력도 훌륭했으나 스스로 자신의 곡을 작곡하는 능력이 비범했다. 그가 녹음한 2,000곡 이상의 곡 중에 리메이크와 민요를 제외한 상당수의 오리지널 곡은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80년대의 나훈아는 70년대만큼 기록적인 레코딩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중적으로는 원숙해진 면모를 과시했다. 그의 최고작 중 하나인 , , ,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로 그는 80년대 초반 최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그는 일본을 비롯, 미국등을 순회하며 자신의 위상을 전 세계로 넓히는 데에 주력했다. 그는 70년대에 남진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으나 80년대 이후 꾸준한 레코딩과 히트송을 내놓으며 성인취향의 가수로 변모, 사실상 남진보다는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 역시 그의 뛰어난 아티스트로서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까지도 꾸준함을 보여줬는데, , 등은 그의 실력이 이때까지도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히트곡들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열정적인 레코딩 활동보다는 라이브를 통해 대중과 만나는 작업을 하고 있고 각종 베스트 앨범과 비디오 등을 출시하면서 40년이 넘은 가수 생활을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나훈아는 소위 '트로트의 황제'라고 불리며 70, 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한국의 대표적 트로트 가수이다. 그를 단 몇 줄로 요약하여 설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의 히트곡만 해도 수십곡에 이를 정도이다. 또한 정규작을 제외하고 발표한 비정규 앨범이나 비공식 앨범을 모두 합치면 적어도 200장에 이르며, 취입곡의 수가 2600곡이 넘어선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매년 의욕적인 라이브 무대를 펼치고 있는 그는 가히 장르를 넘어서 한국의 대표적인 남자 가수 중 한 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비음이 섞인 가는 톤과 허스키함을 두루 갖추었고 노래를 부르는 기교와 무대를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많지 않은 가수인데 특히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트로트의 붐을 일으킬 즈음 '트로트의 황제'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나훈아는 비공식적으로 1962년에 데뷔곡을 취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1969년 작품인 을 통해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이 곡을 그의 데뷔곡으로 알고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그의 트로트는 민요풍의 구성지고 서민적인 느낌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레코딩한 곡 중에 상당수는 우리의 전래 민요나 전통 가요였다. 1969년 이후 70년대까지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레코딩으로 불릴 만한 곡을 상당수 녹음했는데, , , 등 여러 곡이 있다. 그는 노래 실력도 훌륭했으나 스스로 자신의 곡을 작곡하는 능력이 비범했다. 그가 녹음한 2,000곡 이상의 곡 중에 리메이크와 민요를 제외한 상당수의 오리지널 곡은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80년대의 나훈아는 70년대만큼 기록적인 레코딩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중적으로는 원숙해진 면모를 과시했다. 그의 최고작 중 하나인 , , ,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로 그는 80년대 초반 최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그는 일본을 비롯, 미국등을 순회하며 자신의 위상을 전 세계로 넓히는 데에 주력했다. 그는 70년대에 남진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으나 80년대 이후 꾸준한 레코딩과 히트송을 내놓으며 성인취향의 가수로 변모, 사실상 남진보다는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 역시 그의 뛰어난 아티스트로서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까지도 꾸준함을 보여줬는데, , 등은 그의 실력이 이때까지도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히트곡들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열정적인 레코딩 활동보다는 라이브를 통해 대중과 만나는 작업을 하고 있고 각종 베스트 앨범과 비디오 등을 출시하면서 40년이 넘은 가수 생활을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